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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구세주는 없다. 본문

생각 끄적이는 남자

기도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구세주는 없다.

뇌를썰어 2021. 5. 20. 20:19

이 세계에는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계율"
"신의 손"이 존재하는 것일까.
적어도 인간은 자신의 의지마저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베르세르크의 작가 미우라 켄타로의 사망을 기리며.

 

베르세르크를 접한 건 IPTV VOD 서비스를 통해서였다. 우연히 IPTV에서 97년작 검풍전기 베르세르크를 발견하였고, 종종 베르세르크는 꼭 봐야 한다는 주변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시청했다. 초반은 암울한 중세풍 문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거부감 없이 몰입해서 보다가 급작스럽게 등장한 '식'씬을 보고 한동안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절대적 절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것이겠구나 싶은 암울하고 공포스러우면서 두려운 '식'의 전개를 보는 내내, 당사자인 '가츠'가 아님에도 절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원작의 전개가 상당히 느렸기에 검풍전기 베르세르크는 여기서 끝났다.

 

그리고 2번째로 연을 맺게 된 계기는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 2016년 버전의 베르세르크 애니메이션이었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애니메이션도 '식'에서 가짜 구세주 그리피스가 강림하는 '천년제국의 매'편까지 구성되어 있었다.

이미지 측면에서의 영향은 '식'이 최고였지만, 작품의 내용과 가치관 및 주제의식에 대해서 내게 큰 영향을 준 에피소드는 '천년제국의 매'편이다. 특히, '천년제국의 매'편은 세상에 부조리함이 만연한 때 인간은 어떻게 말세를 맞이하고 말세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작품속 '유사 일식'이라는 절망은 군중을 공포로 내몰고 단체 히스테리 현상을 일으켜 결국에는 약자를 힐난하고 저주하다가 마녀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녀사냥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전혀 아니기에 상황은 악화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인간은 결국 구세주를 자발적으로 원하게 된다.

압도적인 재앙과 모든 것을 포기한 인간들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세상에 구세주라는 공간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세상에 구세주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그 구세주의 자리는 대사도인 '그리피스'의 자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했던 세상은 역설적으로 필연적인 멸망을 향하는 길이었다.

이 와중에 거짓 구세주라는 운명에 저항하는 한 사람이 나타난다.

사도 '모즈구스'와 대립하는 인간 '가츠'

위 장면을 보면 누가봐도 왼쪽이 악당같고 오른쪽이 주인공 같을 것이다.

하지만, 저 장면 안에서 싸움을 지켜보는 군중은 악당을 응원하고 주인공을 저주한다. 괴물이 불을 뿜는 힘의 과시가 재앙이 일어나는 탑 아래의 상황을 일시적으로 멈췄기 때문에 사람들은 괴물을 구세주로 착각한다.

잘못된 세상을 돌려 놓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면서도 모두에게 저주를 받는 인간 '가츠'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도의 괴력 앞에서 오히려 싸우고 싶어 한다. 그리고 베르세르크의 명장면이 탄생한다.

구세주는 없다.

세상은 거짓 구세주라는 운명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한 사나이는 구세주라는 이름의 거짓을 알고 끝까지 맞서려 한다.

기도하는 파르네제에 대한 분노는 무엇을 향한 것일까?

정말 기도하는 동안 손이 놀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 오더라도 마음을 추스릴 찰나의 여유는 누구나 필요하다.

어쩌면, '식'을 체험하면서 내가 믿었거나 세상이 믿었던 신이라는 존재는 그저 자신의 여흥을 위해 돋보기로 개미를 지지는 것처럼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증명하고 그로 인해 파멸하는 미물을 통해 가학적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을 찾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구세주가 가학적인 신의 응답이라면 구세주는 신을 위한 기도보다 더더욱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신을 거부하는 행위이며 운명에 저항하는 방법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압도적인 절망 앞에서 신을 찾게 된다.

나는 얼마전까지 어려운 시험 앞에서,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 혹은 단순한 운을 빌기 위해서 다양한 이유로 신을 찾았다. 하지만, 수많은 실패와 절망 끝에서 믿었던 신마저 나를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신을 찾지 않게 되었고, 구세주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저 당장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만이 확실한 표현이며, 발버둥 치는 것만이 나를 위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 장면은 많은 지분이 있다. 눈 앞에 펼쳐진 재앙의 원흉을 앞두고 그를 구세주로 믿는 공포에 질린 군중. 군중의 멸시와 저주 속에서 신을 찾는 인간을 향해 1초라도 싸우기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외치는 가츠의 외침은 3년간의 백수 시절 심적으로 어려웠던 내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베르세르크의 주제의식은 절대적이고 확고한 인과율이 정해준 '운명'에 대해 인간은 얼마나 거스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가츠는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가츠는 사도가 관장하는 '운명'에 대항하기만 할 뿐 이를 피하거나 거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운명을 어떻게 피하고 거스르는지 '베르세르크'라는 작품을 통해 알릴 방법은 사라졌다. 어쩌면 사도를 향해 홀로 처절하게 싸우며 남긴 가츠의 외침은, 그저 미우라 켄타로의 펜끝만 바라보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작가 미우라 켄타로가 독자들에게 남긴 유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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